내가 좋아하는 글(1)
Aug 19, 2024

오늘 오전입니다. 유락에 바나나 푸딩을 전수한 'J'(유락푸딩 참고) 가 공유해준 덕분에 장강명 작가가 최근 SNS에 쓴 글을 읽었습니다. 소논문 수준의 아주아주 긴 글이었습니다. 어느 미디어 비평가(?)와의 설전舌戰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내용도 눈길을 끌었지만, 슬금슬금 대상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뒤 입을 '왁' 하고 벌리는 그 방식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런 방식은 저에게는 꽤 익숙한 것입니다.

냅다 휘두른 야구방망이 정가운데에 공을 정확하게 맞춘듯한 시원함이, 타격감 비슷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소설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신문기자였습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꾹꾹 눌러도 끝내 튀어나오고야 마는 '가시'가 그의 글에는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가 쓴 글을 읽으며 "와!" 감탄했던 것은 저 역시 그런 뾰족함을 추구해왔기 때문일 겁니다. 어쩌면 저 역시 신문기자 출신이어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런 글을 좋아합니다. 날렵하고 단단합니다. 아무리 길어도 끝까지 술술 읽힙니다. 논리와 팩트가 숨쉬듯 깔려있습니다. 치밀하게 쌓인 논리 구조가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거기에 약간의 위트가 담기거나, 읽고 나면 여운이 들게 하는 '전략'이 느껴지는 글이면 더 좋습니다. 기자의 글이 대체로 그렇습니다. 한때 권석천 기자의 글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대학생 때 제본을 해서 가방에 넣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당시 이 선배 글이 "떴다!" 하면 서초동 법조기자들끼리 서로 돌려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생각할 사, 슬퍼할 도>라는 칼럼을 가장 좋아합니다.

김영민 교수의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 문유석 부장판사의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 같은 글은 결이 비슷합니다. 위트와 통찰, 자아비판이 적절히 섞여 있습니다. 대중적인 울림(?)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비슷합니다. 생각해보니 그런 글들이 몇개 더 떠오릅니다. <위력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최문선 기자), <이 비루한 인간의 욕망>(이주엽 작사가)도 지금까지 내용을 줄줄 욀 수 있을 정도로 감명받았던 글입니다. 김민욱 교수의 <콜럼버스여, 달걀값 물어내라> 같은 통찰력 강한 글도, 서민 교수의 <윤창중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처럼 비꼬기로 작정한 글도 머리에 스칩니다.

저에게 좋은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글을 읽고나서 뭐라도 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엉덩이를 들썩들썩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그런 면에선 조광희 변호사가 쓴 <우리가 대법원장에게 기대하는 것>이란 칼럼이 떠오릅니다. 이 글은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대검찰청과 대법원 출입 기자 시절 읽었던 이 글은 저의 인생 경로 자체를 완전히 틀어버렸습니다. 이 대목 때문입니다.

...어떤 가치의 공허함을 넉넉히 알면서도 마치 그 가치가 실재하는 것처럼 실천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 국민주권과 민주주의가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처럼 실천하는 정치인을 원한다. 사랑의 허망함을 알면서도 사랑에 모든 것을 걸면 마침내 사랑은 정말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예술이 농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제단에 삶을 바치면 예술이 삶을 구원한다. 사업을 그저 돈벌이가 아니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려는 끝없는 혁신이라고 믿으면, 그는 실제로 세상의 지도를 바꾼다. 어떤 가치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모든 존재를 걸고 실천하면 그것은 실재가 된다.

나는 수많은 감동적 이야기의 핵심은 이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가 가치의 존재를 비웃는 남루한 인간들에게 핍박과 모멸을 당한다. 그는 꿋꿋이 인내하면서 자신의 삶을 재료로 삼아 그 가치를 창조하는 방식으로 그 가치의 존재를 증명한다."

정치가 아니라 법을 믿는 판사를 원한다. 게임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정치인을 원한다. 요란한 행사가 아니라 영감을 믿는 예술가를 원한다. 그들이 어느 순간 이 지루한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글을 읽고 얼마 안 가 정체모를 누군가 "세상을 함께 바꿔보자"며 찾아왔고, '그래, 선배들은 가진 게 많으니 할 수 없다. 잃을 게 별로 없는 내가 한다.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술가가 되어 이 지루한 세상을 바꿔보자' 합류했다가 흘러흘러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쓰다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다음 글에서 다시 얘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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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e Discovery 우연한 사유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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