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는 이름빨?
Apr 23, 2026

살다보면 '이름빨'이란 게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 인생에 은근한 영향력을 발휘한단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지난해 4월 개봉한 마동석 영화 <거룩한 밤:데몬헌터스>는 평론가들의 혹평과 함께 손익분기점 200만명에 한참 모자른 77만명의 초라한 성적표를 거두고 OTT에 올랐지만, 그 '넷플릭스'(?!)에서 그 '케이팝 데몬헌터스'(!!!!)를 누르고 영화 부문 1위를 기록했습니다. 어찌됐든 1등은 1등이니 제작사 입장에선 '넷플릭스 1위 영화' 타이틀로 잠시지만 쓰린 속을 달랠 수 있었을 겁니다.

하루키 소설 <상실의 시대>도 '이름빨'을 제대로 받은 작품입니다. 1988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비틀즈 노래 제목이죠)으로 처음 들어왔을 땐 판매량이 크게 부진했지만 문학사상사가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재출간하자 그야말로 공전의 대히트를 쳤습니다.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를 대한민국의 '국민 작가' 반열에 올리고 500만부에 가까운 누적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우리만 그랬던 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독일에서는 <나오코의 미소>, 스페인에서는 <도쿄블루스>로 출시되었고, 프랑스판 제목은 책 내용과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불가능의 발라드>였다고 하네요.

재밌는 점은 하루키는 이런 번안 제목을 좋아하지 않아 제목을 바꿔 다시 내달라고 했지만 문학사상사에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없었으면 한국에서 지금의 하루키도 없었을 것"이라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괴랄한 제목 짓기('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등등..)를 즐기고 은근한 자부심도 있어 보이는 하루키인 만큼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겁니다.

신토불이로 현지화된 90년대 하루키 절판본을 들여다보면 이색적인(?) 제목들이 더러 보입니다. 제2의 <상실의 시대>를 꿈꿨겠지만 판본이 전국에 얼마 안 남아 있는 걸 보면 '이름빨'은 별로 받지 못한 것 같네요.

<무라카미 하루키 걸작선 : 내겐 천사같은 그녀>(1998, 정민미디어, 김영곤 옮김)
<무라카미 하루키 걸작선 : 그때 그 女子는 나를 원했던 걸까?>(1995, 정민, 김영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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